한화데이즈 :: 창립 64년 기념! 한국화약에서 시작한 한화의 성장 스토리 대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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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에게 10월 9일은 어떤 날인가요? 누군가에게는 산책하기 좋은 가을 날일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특별한 기념일이 될 수도 있겠네요. 한글의 우수성을 기리는 한글날이기도 하고요. 


그렇다면 한화그룹에게 10월 9일은 어떤 날일까요? 바로, 지난 60여 년의 역사가 시작된 창립기념일인데요. 창립기념일을 맞아 대한민국의 경제 발전과 함께해 온 한화그룹의 지난날을 되돌아보고자 합니다. 이름하여 ‘한화 역사스페셜’! 그 첫 번째 시간은 한화그룹의 창업기, ‘사업보국의 30년’ 편입니다. 함께 1950년대로 떠나볼까요?



1950년대의 대한민국은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광복의 기쁨도 잠시,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그로 인한 피해가 막대했기 때문이죠. 제조업과 국책 기업들이 대부분 폐허가 되었고, 무려 100만 명이 넘는 인명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한편,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화약을 판매하던 화약공판 부산영업소는 활기가 넘쳤습니다. 화약의 수요가 광산을 중심으로 크게 늘어났고, 특히 대구지역은 상동광산의 중석 채광 등 화약의 수요가 많았죠. 이후 곳곳에서 벌어졌던 전쟁 복구 사업에 화약의 수요가 급증했고, 이에 정부에서는 일제 시대 일본인이 운영하다 해방 후 정부 귀속재산이 된 조선화약공판을 민간기업에 매각하고자 입찰공고를 냈습니다. 


1952년 10월 9일, 한화의 창업주인 현암 김종희 회장은 화약의 국산화를 위해 화약공판을 인수·운영할 새로운 회사 법인으로 ‘한국화약’을 설립합니다. 이 회사는 현재 ‘한화그룹’의 모태기업이 되었죠. 이후 폐허나 다름없었던 인천화약공장을 복구시켰고, 인천화약공장에서의 숱한 시행착오 끝에 1959년 1월부터 국산 다이너마이트 생산 및 판매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국내 최초이자 아시아에서 일본 다음으로 두 번째 다이너마이트 생산국이 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죠. 



전쟁의 폐허 위에서 어느 정도의 물가 안정과 산업 발전의 불꽃을 키워가던 한국경제는 1960년대에 들어서며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됩니다. 4·19와 5·16 등 일련의 정치적 격변으로 인해 성장의 둔화와 인플레이션의 위험에 처하게 되었고, 경제는 극도로 악화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한국화약은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 시작합니다. 단순히 ‘돈이 되는 사업’이 아닌 ‘국가와 사회에 보탬’이 될 수 있는 사업을 원했죠. 신규 사업 진출을 위한 첫 구상으로 신한베아링공업의 인수를 진행했고, 1965년 8월, 석유화학 분야로 눈을 돌려 ‘한국화성공업(現 한화케미칼 및 한화첨단소재)’을 설립하게 됩니다. 이후, 무역업에 대한 새로운 구상으로 ‘태평물산(現 ㈜한화 무역부문)’을 설립하고, 금융·보험업에 진출하기 위해 ‘제일화재해상보험’을 인수하는 등 신규 사업에 대한 도전은 계속되었습니다. 


화력발전사업까지 적극적으로 참여한 한국화약은 화력발전 건설과 함께 정유공장 건설을 동시에 추진하기 위해 미국의 유니온오일과 합작투자를 하게 됩니다. 1969년 11월, ‘경인에너지개발주식회사’라는 이름으로 정유 사업에 첫 발을 내딛게 되고, 이러한 한국화약의 행보는 당시 국내에서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새로운 역사가 되었습니다. 기간산업 중심의 사업 전개는 한국화약은 물론 대한민국 산업 발전에 새로운 동력으로 작용했습니다.



1970년대에 이르러 우리나라는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루게 됩니다. 노동 집약적 산업에서 벗어나 중화학 공업의 육성을 모색했고, 수출은 현저히 증대했으며, 국내 건설업체들이 중동건설 붐에 참가하며 고도성장을 이루어 냈습니다. 그야말로 ‘한강의 기적’이라 불릴만하죠.


▲ 위 이미지는 인용의 목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미지 출처 - 더플라자]


한국화약 역시 1960년대 찾아낸 새로운 동력을 바탕으로 사업 확장의 시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외국자본과의 합작 성공으로 새로운 역사를 썼던 ‘경인에너지’는 1972년에 화력발전소를 완공시키고, 1973년 2월부터 본격적인 판매를 진행하며 국가 에너지산업 발전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또한, 당시 조선호텔 이외에는 국제적인 규모의 숙박시설이 없다는 점에 착안하여, 1976년, 국내 최고 규모의 서울프라자호텔을 세우게 됩니다. 이 호텔은 오늘날 서울을 대표하는 더 플라자로 거듭납니다. 



한편, 한국화약은 육영 사업에도 진출합니다. ‘허울뿐인 육영 사업보다는 나라의 초석이 되는 일꾼을 길러내는 진정한 육영사업’을 펼치고자 충남 천안에 북일고등학교를 세우게 됩니다. 현재는 명문 고등학교로서 많은 인재들을 배출하고 있답니다. 이렇듯, 1970년대의 한국화약은 석유화학, 에너지, 무역, 기계, 금융, 건설, 식품, 서비스 등 다양한 분야에서 놀랄 만한 성과를 일궈내고, 이는 곧 훗날 한화가 종합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전쟁으로 피폐해진 조국에 한 줄기 불꽃을 피워낸 한화그룹의 창업 초기 30년을 살펴보았는데요. 과연 이후에는 한국화약이 어떤 고난과 역경을 거쳐 지금의 한화그룹으로 거듭나게 되는지, 한화 역사스페셜 2편 ‘도약의 30년’을 기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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